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 (문단 편집) ==== 새로운 해석: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연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gerhard-richter.com/9127.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547.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569.jpg|width=100%]]}}} || || '''{{{#fff 《루디 삼촌》[br]Onkel Rudi, 1965}}}''' || '''{{{#fff 《마리안네 이모》[br]Tante Marianne, 1965}}}''' || '''{{{#fff 《하이데 씨》[br]Herr Heyde, 1965}}}''' || |||||| 위 세 그림은 독일 현대미술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 ~)가 1965년에 발표한 가족초상화 연작들이다.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된 1960년대 즈음 [[현대미술]]계에서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가의 책무'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여러 예술가들이 독일인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예술 작품들을 이용해 폭로하였는데, 리히터 또한 이 물결에 참가했다. 리히터의 가족초상화 연작은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가족사를 과거 비극적 시대의 역사와 연결짓는다. 우선 가장 좌측의 작품은 1965년작 《[[https://gerhard-richter.com/en/art/paintings/photo-paintings/death-9/uncle-rudi-5595/?pg=6|루디 삼촌(Onkel Rudi)]]》이다. 친족어로 구성된 제목과 사진 속 모델의 순박하게 웃는 얼굴은 가까운 가족 중 누군가의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어딘가 친밀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동시에 어두운 색감과 [[나치 독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군복/독일군|국방군 제복]]은 이와 상반된 불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번진 듯한 질감은 이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들며, 단순한 배경도 장소의 구체성을 약화시킨다. 제목 '루디 삼촌' 역시 그렇다. 1차적으로는 이 작품의 모델이자 실제 작가의 외삼촌이었으며 2차 대전 당시 국방군에 복무했던 루돌프 쇤펠더(Rudolf Schönfelder)를 지칭하지만,[* 루돌프 쇤펠더는 1944년 7월 31일 [[노르망디]]에서 전사했다.] '루디'는 한국의 '철수'처럼 많은 [[독일인]]들이 쓰는 애칭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인상들이 한데 어우러져 '''어디에나 있을 법한 누군가의 가까운 가족, 하지만 전쟁범죄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풍긴다. 다시 말해 '루디 삼촌'은 당대 [[독일군]]으로 참전하여 나치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으나 동시에 누군가의 가까운 가족이기도 했던 불특정 다수, 즉 '''[[악의 평범성]]'''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현재는 [[체코]] 리디체[* 1942년 친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자 나치 독일이 보복 학살을 벌였던 마을이다.]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독일 - 체코 양국 화해의 대표적인 증표이기도 하다. 두 번째 작품 《[[https://gerhard-richter.com/en/art/paintings/photo-paintings/death-9/aunt-marianne-5597|마리안네 이모(Tante Marianne)]]》는 작가의 이모인 마리안네 쇤펠더(Marianne Schönfelder)의 사진을 가지고 만들었다.[* 사진 속 여성이다. 앞의 아기는 어린 시절의 작가 본인.] 독일군 군인인 동생 루돌프와는 반대로 마리안네는 나치즘의 피해자였는데, 1945년 2월에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T4 작전]]의 두 번째 페이즈인 브란트 작전(Aktion Brandt)의[* 친위대 의사 [[카를 브란트]]에게서 따온 작전명이다.] 대상이 되어 살해당했다. 마리안네를 죽인 인물은 드레스덴 지역에서 브란트 작전을 감독하던 친위대 의사 하인리히 오이핑어(Heinrich Eufinger)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리히터의 [[장인]]이기도 했다. 리히터는 결혼하고 나서야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루디 삼촌이 당대의 독일 군인들을 상징한다면, 마리안네는 나치 정부의 희생자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안네는 현재 독일에서 [[한스, 죠피 숄 남매|조피 숄]], 그리고 [[안네 프랑크]]와 함께 나치 정권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작품이자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의 사진을 이용한 《[[https://gerhard-richter.com/en/art/paintings/photo-paintings/death-9/mr-heyde-5620/?pg=8|하이데 씨(Herr Heyde)]]》는 이 복잡한 가족사를 더 심화시켜 보여 준다.[* 그림 아래에는 "1959년 11월, 법원에 출두하는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 im November 1959, als er sich den Behörden stellte.)"라고 적혀 있다.] 의사였던 하이데는 리히터의 장인인 하인리히 오이핑어의 [[친위대(나치 독일)|친위대]] 시절 동료였다. 그는 친위대 의무부대장으로써 [[T4 작전]] 수립에 참여하고 각종 [[홀로코스트|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에서도 근무했다. 그 역시 1945년 리히터의 이모 마리안네의 죽음에 관여되어 있다. 베르너 하이데는 전후에 프리츠 사바데(Fritz Sawade)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그가 친위대 의사 '베르너 하이데'라는 사실은 전후 독일 의학계에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었다. 그는 한동안 일상을 영위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독일 사회의 과거 청산 분위기가 무르익자 결국 1959년에 재판장에 자진출두했다. 그리고 1964년 본격적인 재판이 열리기 전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리히터의 작품 '하이데 씨'는 베르너 하이데가 법원에 출두하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원본으로 한다. 당연하게도, 하이데뿐만 아니라 나치 전범들 모두를 상징한다.[* 김승호. (2020).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가의 책무 -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가족초상화시리즈>(1965)를 중심으로 -. 석당논총, 76, 5-36.] 리히터 일가의 이 복잡하고 기구한 과거사는 그의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초상화 연작에서 볼 수 있는 흐릿한 실루엣은 당대 다른 많은 독일인들의 가정과 인간관계에도 루디 삼촌과 마리안네 이모, 그리고 하이데 씨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위르겐 슈라이버의 미술사 서적인 《한 가족의 드라마(Ein Maler aus Deutschland)》,[* 원제는 '독일의 한 작가'. 국내에는 도서출판 한울을 통해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작가 미상|작가 미상(Werk ohne Autor)]]》이[* 2018년작. 국내에는 2020년에 개봉했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동독 독재정권의 감시를 그린 영화 [[타인의 삶]]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리히터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연이어서 전체주의론에 대해 반박이 가해졌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역사 인식의 포문을 연 것은 마르틴 브로샤트였다. 독일 역사학계를 뒤흔든 저서 <히틀러 국가(Der Staat Hitlers)>에서 마틴 브로샤트(1926~1989)는 나치 정권이 결코 하나의 단일한 목표를 바탕으로 결집한 세력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냈다. 나치당 내의 다양한 세력이 다양한 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저마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브로샤트는 나치 정권이 전체주의적인 정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다극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여담이지만 마틴 브로샤트가 사망한 이후 브로샤트 본인이 나치 당원이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다시 한 번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학계 일각에서는 브로샤트가 본인의 흑역사를 부정하기 위해서 자기 입맛에 맞춘 역사관을 제창한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의 일생과 성과는 구별하는 것이 학계 내의 입장이다.] 한편 브로샤트의 뒤를 이은 알프 뤼트케, 데틀레프 포이커트를 필두로 한 일련의 소장 역사학자들 역시 브로샤트의 주장을 지지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인류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역사(Geschichte von unten)'을 기치로 내걸고 나치 정권 시기에 실제 청~장년기를 보낸 노동자 계층[* 물론 노동자 계층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 계층이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나치 정권의 집권기 내내 가장 큰 잠재적 반대 세력이 노동자 계층이다 보니 이들의 주 연구 대상은 노동자 계층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포이커트의 경우에는 중산층 청소년 집단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나치 정권에 대한 중산층 청소년들의 입장은 본 항목의 하부 서술 및 [[스윙 청소년]] 문서로.]들과의 인터뷰 및 그들이 남긴 무수한 회고록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나치 시대의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연구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먼저, '숨도 못 쉴 만큼 억압적인' 나치 정권 시기라는 기존의 통념이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나치 정권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었던 노동자들에게조차도, 전쟁 발발 이전이었던 1933년부터 1939년까지의 시기의 나치 정권에 대한 기억은 지극히 긍정적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기억 속에서 초기 나치 정권 시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과 궁핍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상당수 해소되었던 기간이었다. 나치 정권은 (공공연하지는 않지만 내심) 자신들을 적대하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이들을 달래고자 노력했다.[* 앞서 여러번 언급됐듯이 나치 정권은 민주주의 선거로 집권한 정당이었기에 제아무리 독재 체제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노동자 계층의 민심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치 정권이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젊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억제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성들에게 많은 일자리가 돌아갔으며, 노동자들은 다시 사회적 지위 상승(중산층으로의 계층 상승이 아니라, 노동자 계층 내에서의 지위 상승 -예를 들어 숙련공 대우-)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나치 정권이 도입한 복지 정책인 기쁨을 통한 힘(KdF, Kraft durch Freude)을 통하여서 노동자들에게는 이전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여가 생활(가령 인근 [[영국]]/[[프랑스]]로의 해외 여행이라든가,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클래식 청취)을 향유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수많은 당대 독일인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결코 정권의 일방적인 통제에 의해 돌아가는 국가가 아니었다.''' 나치 정권의 통제력은 오로지 국가 차원의 정책이 평범한 독일인들의 이해 관계와 수렴할 때에만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36년 이후 나치 정권이 대외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4개년 계획(Der Vierjahreplan)을 수립하고 노동자들의 근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노동생산성이 급락하는 한편 불량품 발생률이 치솟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이 의도적으로 [[사보타주]]를 펼쳤던 것이다. 도시 노동자들 의외에도 다양한 세력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와 반하는 정부 정책에 대항하였다. 농촌에서는 농민들은 자신의 농작물을 군수물자로 공출하려는 정권의 움직임에 대해 암시장 반출과 같은 [[지하 경제]] 행위로 저항하였고, 도시의 청년들 역시 획일적인 [[히틀러 유겐트]] 문화에 반발하여 [[에델바이스 해적]]이나 [[모이텐]]과 같은 조직을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히틀러 유겐트 간부들에 대항[* 히틀러 유겐트 간부들에게 야유를 퍼붓고 도망가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대범해져서 두들겨 패는 경우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오죽하면 루르 지역의 나치 관구 담당자가 이를 갈면서 질서경찰에게 검거 협조를 요청할 정도. 심지어 전쟁 말기였던 1944년에는 [[쾰른]]에서 일부 청소년들이 무장봉기를 시도하기도 하였다.]하였다. 북아프리카 전역과 노르망디 전역에서 제21기갑사단 소속 장교로 복무한 한스 루크도 회고록에 전쟁 이전 나치 지도부를 개그 소재로 써먹은 코미디언 이야기가 소개되며 1939년 이전까지는 나름 경직적이지 않은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전쟁이 터지고 1942년부터 전황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통제가 강화되면서 이전의 생기넘치던 독일의 모습이 없어졌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나치 정권 독일 사회는 부분적인 일탈과 저항[* 체제 자체에 대한 항쟁(Widerstand)과 구분하기 위해서 브로샤트의 경우는 소극적인 일탈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Resistenz라는 개념을 창안해냈다.]이 만연한 사회였던 것이다. 알프 뤼트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치 정권에 대한 대다수 독일인들의 입장은 (자신의 이익이 보존되는 한에서 암묵적으로 정권을 인정하는) 유보적 수용(Abwartendes Hinnehmen)에 가까웠던 것이다. 요컨대, 나치 독일 시대는 결코 순응하는 대다수 국민 對 처절히 저항하는 소수의 영웅[* 예를 들어 [[백장미단]].]의 [[이분법]] 구도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바꿔 말해서 '''체제 자체에 대해서는 적당히 순응하면서도, 부분적인 일탈과 저항 역시 만연한 회색 지대(Grauzone)'''가 당대 독일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 심지어 일부 일상사가들은 [[백장미단]]과 같은 나치 독일에 항쟁한 일부 인물들에 대해서 박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이들 역시 그저 소극적인 저항을 펼치다가 나치 정권에게 시범 사례로 걸렸을 뿐인데, 전후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위해 [[동독]] 정부와 [[서독]] 정부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의 영웅으로 신격화됐다는 것이다. 이게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백장미단의 체포일은 1943년 2월 18일로 괴벨스의 저 유명한 총력전 연설과 동일한 날이다. 나치는 아리아인이 확실한 반나치 인사들을 처리할 때 무작정 죽이기보다는 치부를 찾아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적당한 고위직을 줘 입막음하는 선에서 끝냈는데 백장미단은 이례적으로 4일만에 신속하게 처형당했다. T 계획에 반대하던 성직자들은 함부로 못 건들던 나치가 본보기로 대신 처형시켰다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일상사의 수정주의적인 시각은 독일의 역사관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역사관은 나치 정권 그 자체를 철저한 악이자 입막이로 묘사해왔다. 그로써 많은 독일 국민들은 ("악마적인 정권이 폭압을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식의)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왔지만, 일상사가들에게 이러한 도식은 도덕적으로는 유의미할지라도 당대 독일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치가 탄압했던 정치적 반대 세력, 유대인, 집시, 성 소수자들은 일반 독일인에게도 똑같이 혐오됐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 특히 [[동성애자]]와 같은 성 소수자들은 나치가 패망하고 서독이 세워진 후에도 나치즘의 희생자로 분류되지 않았던 데다, 오히려 [[정신병원]] 같은 곳에 끌려가 탄압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본 단락 서두에 언급된 저명한 일상사 연구자인 데틀레프 포이커트는 본인도 동성애자여서, 나치 치하의 동성애자들의 삶을 연구하는 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서 나치의 범죄 행위에 배경에는 나치 정권이 제공해주는 자그마한 이권에 취해 정권으로부터 박해 받는 이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 독일인 모두의 책임이 존재하는 만큼, 나치 독일이란 결코 역사상의 일탈[* 산업화에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근대성이 결여됐던 [[독일 제국]]의 1871년 성립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 나치 독일로의 이행이 역사적 필연인지, 우연인지에 대한 논쟁은 독일 사학계에서 1945년 뒤로 오랫동안 격렬한 논쟁거리였다. 이를 특수여정([[https://ko.m.wikipedia.org/wiki/%EC%A1%B4%EB%8D%94%EB%B2%A0%ED%81%AC|Sonderweg]]) 테제라고 부른다.]이 아니라 현대 독일 사회에서도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소수자에 대한 또 다른 박해와 몰이를 막기 위한 철저한 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치 시기와 비슷한 일이 현재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